무턱대고 여유를 부려본 게 언제쯤일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은 정말 짧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청산도 곳곳을 누비며 깨달았다. 24시간은 꽤 여유롭게 흘러가는 시간이었다는 걸. 굳이 재촉하지 않아도, 서두르지 않아도, 여유를 부려도 괜찮은 시간이었다는 걸.
청산도는 사계절 언제고 찾아도 매력이 넘치는 섬이다. 잘 알려진 영화 <서편제> 촬영지와 범바위는 소박한 바닷가 섬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고,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 경치가 아름다워 계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찾는다. 여러 사람이 오가는 섬답게 완도항여객선터미널에서 청산도까지 가는 배편이 하루에 6회 운행되고 있다.
여객선을 타고 1시간 정도 지나면 청산도 도청항에 다다른다. 도청항은 청산도슬로길 1코스의 출발점이다. 1코스 중에서도 미항길은 ‘아름다운 항구를 품고 있다’라는 의미를 지녔는데, 도청항방문자센터, 도청리쉼터, 갤러리, 도락리안길까지 이어진다. 도청항에서 부둣가를 따라 걷다 보면 관광객, 상인, 주민, 수산물과
농산물 등이 한데 모인 바닷가 마을의 진풍경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다.
도청항을 상징하는 빨간등대와 하얀등대를 지나, 선선한 가을 바닷바람을 맞으며 도락리까지 걸어보자. 도락리에는 아직도 오래된 초가집이나 기와집들이 남아있어 섬마을 풍경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슬로길의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라 볼거리도 풍부하다. 낮은 담벼락을 꽉 채워 그린 아기자기한
벽화부터, 도락리 마을의 오래된 우물 동구정, 도락어촌체험마을, 개매기 체험장 등을 볼 수 있다. 작은 섬마을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가 정겨움을 자아낸다. 도락리 뒤편으로는 청산도의 자랑 서편제길이 이어지니, 천천히 걸으며 가을 분위기를 제대로 만끽해 보는 것도 좋겠다.
아름다운 항구를 품은 미항길을 지나 이번엔 7코스 돌담길로 가볼까. 돌담길의 시작은 상서돌담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돌담으로 이뤄져 있는데, 바람이 많은 섬 지방의 환경에 맞춰 흙을 쓰지 않고 돌로만 쌓은 구조가 특징이다. 청산도 다양한 마을이 돌담으로 이뤄져 있지만, 상서마을의 돌담은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어서 섬마을 주거 문화를 파악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고. 상서마을에서는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된다. 담장이 워낙 낮아 집집마다의 풍경, 기르는 가축 등을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염소나 소의 우리 역시 돌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풍경들을 눈에 담고, 돌담을 가득 메운 담쟁이넝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도 좋다. 포근한 풍경이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나도 아까우니까. 그렇게 천천히 걷다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포토존에 서서 가쁜 숨을 골라보자. 멀리 구들장논이 보인다. 구들장논은 청산도 특유의 농업유산이다. 예로부터 청산도 주민들은 전부터 경사진 땅에 논을 만들기 위해 밭처럼 층층이 계단을 내고, 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바닥에 넓은 돌을 깔아 논을 만들었다. 지형이 가파르고 흙이 얇아 그냥 두면 물이 스며들어 버리는 청산도 지형의 특성을 살린 농업 방식으로 지금까지도 지켜오고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전복의 고장 완도답게 바닷가 위에 떠 있는 상산포의 전복 양식장이 보인다. 다른 바닷가
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라 그런지 더 새롭게 다가온다. 거기서 조금만 더 지나오면, 슬로길 9코스의 한 구간인 단풍길을 만날 수 있다. 단풍길은 정골꼬랑(상수원 입구), 국화리, 오천기미, 지리청송해변까지 이어지는 길인데, 가을에 가장 인기 있는 길이기도 하다. 가을을 상징하는 코스모스가 길목에 피어있고, 길게
이어진 단풍터널도 볼 수 있다. 아직 초록빛이 대부분이지만, 붉게 물들면 장관일 듯싶다. 단풍터널을 지나 도청항에 다다를 때쯤, 바다를 더 오래 눈에 담고 싶어 도청항과 가장 가까운 지리청송해변으로 갔다. 조용한 매력이 있는 지리청송해변은 해변을 따라 200년 이상 된 노송이 있는 구간까지 산책하기 좋다. 일몰이
정말 예쁜 곳이라는데, 가을의 절정에 다시 찾겠노라고 다짐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본다.
곳곳에 스민 소박함에 오히려 마음이 더 풍요로웠던, 청산도 여행길. 누군가의 재촉 없이, 시간에 쫓기지 않고 자연의 흐름을 따라 천천히,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얼마나 소중하게 다가오는지. 그 사실을 깨닫게 해준 청산도에서 시간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느리게 지나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