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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옆 예술관

어느 날 문득 제주로
그림으로 전하는 위

김혜민 작가

글. 박영화 사진. 정우철

낮은 돌담과 포근한 나무, 너른 바다가 있는 제주 김녕. 김녕의 어느 한적한 골목에 그림 작업실 혜민장과 초콜릿 가게 구아우쇼콜라가 있다. 동네 분위기와 어우러지면서도 시선이 가는 특별한 양옥. 혜밍 작가는 이곳에서 광활한 자연 앞에 작은 점처럼 부서진 파도가 되었다가 잔잔한 윤슬이 되기도 하면서 제주의 풍경에 자신을 담아냈다. 자신에게 또 혜민장을 찾는 누군가에게 그림이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음이 단단해지는 시간

서울 이태원 우사단길. 화려한 서울의 중심지에서 생활하던 혜밍 작가는 어느 날 도시의 속도와 자신의 속도가 맞지 않다고 느낀다. 복잡하고 빠른 세상을 쫓는 게 지칠 때쯤 불현듯 ‘제주에서 살아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사에 다니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도 초콜릿을 만드는 쇼콜라티에로 살고 싶어 했고요. 서울에서의 바쁜 삶보다 제주에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사실 퇴사를 결심하기 전, 혜밍 작가에게 잊지 못할 만큼 힘든 순간이 있었다. 엄마의 뇌졸중. 매일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절망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기로 한다. 병과 힘겨운 싸움을 하는 엄마의 간병 스토리를 그림으로 그려서 <오늘도 우리는>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다.

“아픈 엄마를 보는 것도, 간병하는 것도, 또 나만 뒤처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힘들었어요. 혼자 멈춰있는 것 같았죠. 긴 투병 생활을 마치고 엄마가 무사히 퇴원해서 기쁘기도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친구들의 위로 덕분에 조금씩 힘을 낼 수 있었어요.”

혜밍 작가는 누군가에게 받은 위로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지럽고 복잡한 마음을 다독여 주는 것만 같다. 이렇게 마음이 단단해진 사람의 그림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코난비치> 2023, 210x297mm, digital drawing
이제는 ‘코난비치’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행원리 바다. 장마철 제주는 노을이 절정에 이르는데, 바다도 함께 핑크빛으로 물든다.

한적한 마을에 나타난 멋진 가게

혜밍 작가가 처음 정착한 곳은 제주 서귀포였다. 초콜릿이 입소문을 타면서 가게를 찾는 손님이 많아졌고, 부부는 집과 가게만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제주에서 바라던 여유를 느낄 새도 없이. 바다를 보는 일은 겨우 일 년에 세 번 정도였다. 좀 더 자연과 가깝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무렵, 김녕의 풍경과 마주했다. 아름다운 바다와 이국적인 모습의 항구, 조용한 골목까지 갖춘 김녕에서라면 바라던 제주에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밖을 나서면 바다가 펼쳐져 있고, 바다 위로 떨어지는 노을을 보는 것만으로도 걱정이 사라지고 위로가 되었어요.”

김녕의 어느 한적한 골목에 있는 양옥집을 고쳐, 1층은 초콜릿 가게로, 2층은 혜밍 작가의 그림을 감상하고 구매할 수 있는 갤러리 겸 아트숍으로 꾸몄다. 작가의 이름 ‘혜민’에 장소 ‘장’을 합쳐 ‘혜민장’이라는 이름도 지었다.

“도시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고요한 풍경과 여유로움 앞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면서 ‘모두에게 보내는 동시에 나에게 보내는 위로입니다’라는 문장을 늘 떠올립니다. 혜민장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그림 앞에서 마음껏 머무르다 가볍게 날아오르길 바랍니다.”

<위안이 되는 것들> 2019, 595x840mm, Acrylic On Canvas
품에 안은 강아지는 반려견이자 작가 곁에서 사랑과 응원을 보내주는 고마운 이들이다.

잊히지 않는 <위안이 되는 것들>

요즘 혜밍 작가는 전시 준비로 한창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일’에 대한 주제로, 우리는 때로 자신을 너무 미워하고 괴로워하며 살고 있는데, 나의 못난 부분에 지지 말고 함께 잘 살아가자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보여주기 위해 준비 중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진행한 많은 전시 중 그녀는 어떤 전시를 가장 특별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을까.

“제주로 오기 전 2019년에 진행한 전시 <위안이 되는 것들>이 잊히지 않아요. 힘든 시기에 그린 그림인데 작업 과정과 결과에서 큰 위로를 받았어요. 특히 포스터 그림에서 품에 안긴 강아지는 제가 키우는 반려견이면서 동시에 사랑과 응원을 보내주는 고마운 이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지치고 힘들 때 이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다시 나아갈 힘을 얻곤 합니다.”

힘든 작업이 될 것이라는 걱정과 달리 며칠 밤을 새우며 준비해도 행복했다는 혜밍 작가. 작품들이 전시장의 조명을 받았을 때, 그리고 그 작품들을 관객이 바라볼 때의 감동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때로는 제 삶이 고되다고 느낀 적도 있었지만, 나의 그림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된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림으로 말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혜밍 작가의 남편은 현무암 모양의 달콤한 초콜릿을 준비해 주었다. 남편의 달콤한 외조가 그녀의 그림에서 위로를 만들어 내는 원동력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시 벽에 걸린 그림을 본다.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녀가 김녕의 바다를 보고 느꼈던 것처럼.

혜민장에 전시된 작가의 작품들.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잠시나마 위로가 되는 그림들이다.

김녕의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구아우쇼콜라와 혜민장

그림을 그리면서 ‘모두에게 보내는 동시에
나에게 보내는 위로입니다’라는 문장을 늘 떠올립니다.
혜민장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그림 앞에서
마음껏 머무르다 가볍게 날아오르길 바랍니다.

<Take-off> 2021, 210x297mm, Digital Drawing
누군가의 출발에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