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시속 140km가 넘는 기습적인 폭풍 ‘폴리’가 유럽 최대의 무역항 네덜란드 로테르담 로젠부르크 인근 해협을 덮쳤다.
거대한 화물선들이 흔들리고, 사방에서 파도가 몰아쳤다.
모두가 해안가가 무너지지는 않을까 숨죽였지만, 바닷속 6톤짜리 콘크리트 덩어리 17개가 미동조차 없이 해안가를 지켜냈다.
정말 신기한 일은 폭풍이 지나간 뒤에 일어났다. 네덜란드의 스타트업 ‘리피(Reefy)’의 방파제 ‘리프블록(Reefblocks)’의 이야기다.
흔히 방파제라고 하면 둥근 뿔의 삼발이 모양을 떠올린다.
테트라포드라고 불리는 이 방파제는 파도를 막아 육지를 보호하는 고마운 존재지만, 바다 생물들에게는 표면이 매끄러운 탓에 부딪히면 튕겨 나가는 차가운 절벽과 같다.
이때 네덜란드의 스타트업 ‘리피(Reefy)’는 파도를 막으면서 바다 생물도 품을 방법을 고민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인공 산호초 블록, ‘리프블록(Reefblocks)’이다. 마치 레고 부품처럼 무한한 조합으로 조립할 수 있는 모듈형 구조로 바다 지형에 맞춰 자유자재로 쌓아 올리면, 거센 조류에도 꿈쩍하지 않는 안정적인 암초가 완성된다.
리프블록의 겉모습은 육중한 콘크리트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블록 안에는 미로 같은 터널과 그늘진 통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간의 눈에는 정교한 콘크리트 미로처럼 보이지만, 바다 생물들에게는 거센 물살과 포식자를 피해 숨을 수 있는 아늑한 지하대피소인 셈이다.

ⓒ Reefy
리프블록의 특징은 울퉁불퉁한 표면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거칠고 구멍이 숭숭 뚫린 다공성 구조는 바다 생물들에게 집터가 된다. 조개류와 해조류는 매끄러운 벽에는 붙지 못하지만, 거친 표면과 홈 사이에는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리프블록 설치 후 2년이 지나자, 눈에띄는 변화가 관찰되었다. 블록 주변의 생물 다양성이 일반 콘크리트 벽보다 무려 3배 높아진 것이다. 텅 비어 있던 회색 구조물이 단숨에 멸치와 게, 새우들이 복작이는 바다의 핫플레이스로 변신했다.
선순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블록 표면에 자리 잡은 조개들이 부지런히 바닷물을 빨아들이고 뱉으며 천연 필터 역할을 했다. 분주한 항구의 탁했던 물이 스스로 맑아지며 자정 능력을 회복한 것이다.

ⓒ Reefy
리프블록은 해안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도 완벽하게 해낸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면 무조건 막아서기보다는 블록에 뚫린 구멍과 터널 사이로 자연스레 물길이 분산된다. 블록으로 파도가 얌전해지자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일어났다.
잔잔해진 물살을 타고 블록 뒤쪽으로 모래와 진흙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이후로 인간이 인위적으로 흙을 채워 넣지 않아도 바다가 스스로 해안 침식을 막고 땅을 두텁게 만들어 천연 방어벽을 완성했다.
이제 이 리프블록은 네덜란드의 강과 멕시코 카리브해의 열대 바다로도 향하고 있다. 그동안 인류의 기술은 자연을 억누르는 쪽으로 발전해 왔지만, 이제는 자연이 기술을 통해 스스로 치유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바다로부터 인간을 지켜주는 방패이자 바다 생명의 숨으로 채워진 보금자리, 리프블록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또 다른 기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