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선주 사진. 정우철
우리의 인생이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삶이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갈지라도 당황하지 말자.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흘러가는 방향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얻게 되는 게 분명 있을 테니. 전현주 작가처럼 말이다. 계획하지 않았던 제주살이에 정신없는 날들이었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자신만의 이정표를 만들어 나갔다. 여전히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지만, 그녀는 그 과정에서 얻는 것들을 결코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최남단, 제주 대정읍. 그 안의 조용한 마을 하모리와 잘 어울리는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의 정체는 전현주 작가가 운영하는 주주스튜디오다. 평소 톡톡 튀는 색감과 귀여운 일상 그림으로 사랑받고 있는 전현주 작가가 제주에 와서 애정을 담아 문을 연 일러스트 쇼룸이자 작업실이자 클래스 공간이다. 화장품 브랜드 그래픽 디자이너는 전현주 작가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기 전 갖고 있던 직업이었다. 약 10년을 활동했던 디자이너로서의 일은 나름 재미도,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잦은 밤샘으로 몸이 힘들었고, 그녀는 결국 퇴사를 결심했다.
“이직하고 회사를 1년 더 다녔어요. 마지막 회사를 끝으로 직장생활도 끝냈죠. 그리고 바로 사업자등록 후 프리랜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때 처음 만든 이름이 주주스튜디오였는데, 이렇게 계속 사용하고 있네요.”
호기롭게 시작했던 프리랜서 활동.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코로나19라는 전 세계적인 변수에 전현주 작가 역시 손쓸 방법이 없었다. ‘집콕 생활’이 이어지면서 몸과 마음이 힘들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코로나19를 온몸으로 마주하고 있었던 때,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다시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남편이 제주로 회사를 옮기게 되면서 준비할 틈도 없이 이사를 결정했어요. 보통 제주에서 제주살이를 하는 이유를 물으면 나를 돌아보기 위해서라든지, 도시를 벗어나 자연에서 살고 싶다든지 등의 이유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정말 갑자기 왔어요.”
“이사 온 날이 제주에 처음 입도한 날이었어요. 하지만 이때도 코로나19가 심해서 밖에 돌아다니지도 못했어요. 밤샘 작업을 하다가, 해 뜨면 잠에 드는 불규칙한 생활을 이어갔죠. 너무 지쳐서 이렇게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전현주 작가는 작업실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낮은 구옥, 작은 앞마당이 있는 공간을 상상하며 열심히 발품을 팔았지만, 작업실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 실망하며 마지막 부동산을 나가던 중 지금의 주주스튜디오 공간을
만나게 되었다.
“3층짜리 빨간 벽돌로 된 건물이었는데, 빛바랜 종이에 크게 ‘임대’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 옆에는 ‘샘문구슈퍼’라는 간판이 있었고요. 여기다 싶어 알아보니 15년 동안 문구점으로 운영되던 곳이더군요.” 90년대
문구류와 지류함, 종이 냄새까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공간이 맘에 들었던 전현주 작가는 매료되어 계약했고, 기존의 공간을 크게 바꾸지 않는 선에서 한 땀 한 땀 인테리어를 하고 스튜디오 문을 열었다.
작가가 한 눈에 반한 문방구는 지금의 주주스튜디오가 되었다.
주주스튜디오 근처에는 국제학교가 있다. 이런 지역적 특색이 전현주 작가에게 또 새로운 경험을 선물해 주었다.
“저는 누구를 가르쳐 본 경험이 없었어요. 그런데 학부모님들이 제 인스타그램을 보고 클래스 문의를 해주시더라고요. 신기했죠. 7살 친구와 함께 클래스를 처음 시작한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순수한 상상력을 그림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보며 얻는 게 많다고. 홈페이지에 아이들의 작품을 ‘Little Artist’라는 이름으로 전시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아이들의 그림부터 함께 지내는 고양이 두 마리, 일상에서 마주한 재미난 에피소드까지. 자연스러운 것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힌다. 색이 가지고 있는 힘을 아는 그녀는 색감을 유독 신경 쓰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톡톡 튀는 색감이 돋보이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색감은 그녀의 그림뿐만 아니라 그녀가 만드는 우드 오브제, 굿즈 등에서도 묻어난다.
“어릴 적 제가 일상에서 받은 위로를 사람들도 받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일상을 그림에 담아내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갈 생각입니다. 제 그림이 마음에 편안함을 가져다주면 좋겠네요.”
벌써 1년이다. 계획하지 않았던 제주에 스튜디오를 오픈하고, 운영한 게. 전현주 작가는 지금 스튜디오를 함께할 팀원들도 만났고, 제주에만 국한되지 않는 아트 브랜드로 활동을 넓혀가겠다는 목표도 정했다. 하고 싶은 것만을 하는 것 보다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가르쳐준 제주살이가 없었다면, 가능했던 일들이었을까. 최남단, 작은 마을에서 품은 작가의 꿈이 어쩐지 더 짙게 다가온다.
WHEN LIFE GIVES YOU ORANGES STAY WILD
GREEN BARLEY C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