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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세이

눈부시게 빛나는 제주의 추억
여름 바다 이야기

글. 정여울 작가

제주도의 바다는 그야말로 변화무쌍하다. 보드랍게 찰랑거리다가도 어느 순간 무시무시한 기세로 덮쳐오는 파도. 날씨가 좋을 때는 에메랄드빛과 터퀴스블루가 섞인 오묘한 빛을 내다가도, 날씨가 흐려지면 마치 먹물을 흩뿌려 놓은 것처럼 우중충한 빛을 띠기도 한다. 4박 5일 제주 여행을 떠났다가 나흘 동안 비가 내리고 마지막 날 서울에 돌아올 때 그제야 태양이 나를 약 올리듯 방싯거리며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발리나 코타키나발루 부럽지 않게 푸르디푸른 제주 바다를 떠올리다가 날씨가 안 좋을 때 여행을 떠나면 허탕을 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변화무쌍하고 변덕이 죽 끓는 듯한 제주의 바다를 사랑한다. 해녀들이 직접 그날 물질해 온 해산물로 요리해 주는 성게미역국이나 갈칫국을 좋아하고, 언뜻 불친절한 듯하다가도 조금만 친해지면 얼마든지 오랫동안 푸근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주는 제주 사람들의 사투리도 사랑한다.

오직 제주에만 있는 것들. 그런 소중한 존재들 중의 하나는 제주의 변화무쌍한 바다다. 하나의 섬에 이토록 다채로운 바다의 모습이 존재한다니. 한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투명하게 빛나는 쇠소깍의 아름다움은 넋을 잃게 한다. 협재해변의 눈부신 푸르름과 핑크빛 저녁노을은 또 어떤가. 그런 아름다움은 오직 제주에만 있을 것 같다. 게다가 한여름 제주의 각종 해산물 요리 등을 생각하면, 바다에서 이토록 우리 입맛에 딱 맞는 다채로운 음식들을 하루 종일 (심지어 야간에도 배달하여) 먹을 수 있는 곳은 한국밖에 없을 것 같다. 함덕해변의 장엄한 푸르름과 그 바다 곁을 병풍처럼 둘러싸며 굽이치는 서우봉의 완벽한 조화는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절경이다. 용머리해안의 가파르면서도 미로처럼 난해한 곡선은 ‘여기가 과연 한국인가’ 싶을 정도로 이국적이면서도 매혹적이기 이를 데 없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 도달한 듯한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용머리해안에는 존재한다. 광치기해변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성산일출봉에서 바라본 제주 바다의 절경 또한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끼게 해준다. 세화해변에는 그야말로 우리가 바다를 향해 꿈꾸는 모든 것들이 있다. 크지 않은 해변임에도 불구하고 영롱한 바다 빛깔과 엽서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카페들이 여행자들을 반겨준다. 김녕해변 또한 그 새하얀 모래들이 반짝이는 바다의 절경이 마치 걸으면서 수채화를 그리는 듯한 감동을 준다. 제주는 습도가 높아 육지보다 더 더울 때도 많지만, 바닷가에 다다르면 어느새 더위도 시름도 다 잊게 만드는 파도 소리와 바람이 우리를 반겨준다.

몇 년 전 여름, 동생과 함께 ‘제주도 한 달 살이’를 하면서 제주의 온갖 바다들이 지닌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경험했다. 바닷가 카페에서 글도 쓰고, 올레길도 걸으며 지친 마음을 달래주던 그 시간들은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할 정도로 소중하다. 제주의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바다는 가끔 위험하기도 하다. 중문색달해변에서 굽이치는 파도의 모습에 넋을 잃고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내 몸이 확 밀리는 듯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파도가 너울로 바뀌는 시간,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파도가 거세져서 수영은 위험하니 빨리 물 밖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물 밖에서 산책만 하고 있던 나도 파도의 거대한 위력을 느꼈을 정도이니, 너울성 파도의 위력은 실로 위협적인 것이었다. 때론 평화롭고 때론 위협적이며, 때론 아름답고 때론 우울하기 이를 데 없는 어두운 풍경을 보여주는 바다는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거대한 신비였다. 바다가 좋은 이유는 그곳에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발견하는 겸허한 깨달음의 공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온갖 번뇌로 가득한 마음을 안고 바다로 도망치면, 푸르게 펼쳐지는 광활한 해안선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너의 고민은 이 바닷물에 떨어지면 한 방울의 잉크 같은 크기란다. 한 방울의 잉크가 바다 색깔을 바꾸진 못하잖아. 그러니 바다의 품에 안겨 너의 모든 시름을 잊으렴. 이곳에서는 너의 모든 걱정을 내려놓아도 된단다.”

바다의 너른 품에 안겨 실컷 울고 나면 우리의 고민은 어느덧 처음보다는 훨씬 작게 축소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를 둘러싼 자연의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시간. 그럼으로써 ‘나’라는 존재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에너지를 풀어내어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시간이야말로 여행이 필요한 시간, 바다가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