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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세이

영국의 브라이튼 해변에서
마라토너를 만나다

글. 정여울 작가

나는 겨울과 봄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사랑한다. 겨울의 추위가 지겨워질 때쯤, 이제 제발 봄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일교차가 커지며 대낮의 햇살이 살금살금 따스해지고, 낮이 길어지는 느낌이 들며, 그러다가도 날씨가 돌변하며 꽃샘추위가 찾아들기도 하는 그런 시절. 아직은 차가운 밤바람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꽃망울을 터뜨린 목련을 바라보며 마침내 올 ‘봄의 승리’를 예감하는 즈음. 이런 시절에는 봄의 기미를 예감하는 모든 자잘한 징후들에 쫑긋 귀를 기울이게 된다. 지역별로 벚꽃 개화시기를 알아보며 어디로 꽃 구경을 갈까 고민해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바빠서 결국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바쁘게 일터로 향하다가 가로수에 갑작스레 핀 벚꽃을 바라보며 ‘이제 정말 봄이로구나’하며 애틋해하는, 그런 시기.

나는 그런 아름답고도 혹독한 시기를 영국에서 보낸 적이 있다. 아름다움은 봄을 향한 설렘 때문이고, 혹독함은 따스한 봄햇살을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운 영국의 가혹한 날씨 때문이었다. 나는 취재 때문에 런던에 갔다가 하루 시간을 내어 런던에서 비교적 가까운 해변 도시 브라이튼으로 갔다. 브라이튼으로 가면 좀 더 따스한 봄햇살을 느껴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날씨를 열심히 검색해서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는 날, 비가 오지 않는 날로 점찍어 보았지만, 일기예보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오전에 도착했을 때는 여전히 흐린 날씨였다. 낙담했다.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를 보기는 글렀구나. 그런데 거리를 걷다가 도로를 봉쇄하는 것이 보였다.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도록 여기저기에 차단막을 쳐놓은 것이 보였다. 무슨 큰일이 났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더니 그날은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마라톤이 열리는 날이었다. 사람들이 그야말로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모두 패딩코트를 입고 있는데, 뛰는 사람들은 반바지에 러닝 차림이었다.

문득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는 듯했다. 브라이튼 해안도로를 향해 있는 힘껏 달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였다. 인간의 달리는 몸이 그토록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 남녀노소 누구나, 빼빼 마른 몸이든 건장한 몸이든 상관없이, 다만 그들이 바닷가를 향해 끝없이 달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같이 다 찬란하고 눈부시게 다가왔다. 성별도 나이도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마라톤의 묘미는 ‘달리기의 기술’이 아니라 ‘누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린다는 사실’ 그 자체였던 것이다.

‘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다’는 생각에 빠져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비로소 햇살이 따스해진 것이 느껴졌다.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사진을 열심히 찍다 보니 하늘을 못 봤던 것이다. 하늘은 푸르르게 빛나고 있었다. 구름은 어느새 말끔하게 걷히고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이 푸른 바다와 함께 반짝이고 있었다. 응원하는 사람들은 오전에는 두꺼운 코트에 털모자까지 쓰고 있었지만 어느새 그들도 마라토너들처럼 하나둘씩 두꺼운 옷을 벗고 있었다. 햇살이 따스해지고, 하늘은 높고 푸르러지고, 마라톤의 열기와 응원의 열기가 합쳐져 어느새 거리는 후끈 달아올랐다.

봄 바다의 아름다움은 그런 것이었다. 아침에는 겨울바람이 불더라도, 오후에는 어느덧 몰라보게 따스해진 봄바람이 불 수도 있다는 것. 어제까지의 칙칙하고 우울하던 런던의 날씨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는지, 내 마음은 어느덧 따사로운 봄바람으로 가득 차올랐다. 언젠가는 나도 이 부족한 체력을 잘 길러서 마라톤에 참가할 수 있을까.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운데, 뛰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일까. 무려 1만 명이 넘는 시민이 그날 브라이튼 마라톤 대회에 참여했다고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왜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미루기만 해왔을까. 나는 봄빛이 쏟아지는 브라이튼 해변 위로 날아오르는 새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했다. 나도 너희들처럼 날아오를 수 있다면. 봄바람처럼, 봄 바다의 햇살처럼, 봄 바다의 파도처럼, 그렇게 가득한 설렘의 기운을 전해주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글이 당신에게 따스한 봄바람이 될 수 있기를. 어제까지는 힘든 일로 가득한 ‘혹한기’였던 우리 마음이, 봄 바다의 따스한 기운처럼 밝아지고 환해지고 너그러워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