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깜짝할 사이에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빠른 만큼 편리해졌지만, 가끔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속도가 버겁기도 하다. 여유는 사치라는 듯한 도시를 피해 조금의 느림은 아무 상관 없는, 느린 게 오히려 괜찮다는 섬, 청산도로 갔다. 청산도에서 알게 된 느림의 미학.
Text. 임혜경 Photo. 정우철
고즈넉한 청산도의 전경
청산도는 전라남도 완도에서도 50분 남짓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완도 역시 우리나라 땅끝마을이라 불리는 해남 옆 동네이기 때문에 수도권 기준으로 이동 거리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멈칫할 필요는 없다. 꽤 잘 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교통편 덕분에 전국 방방곡곡 가지 못할 곳은 없으니까.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는 KTX를 타고, 목포에서 1시간 40분 남짓 달려 완도 연안여객선 터미널로 향하는 방법이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가장 최종적으로는 배를 타야 하기 때문에 가장 편한 방법으로 완도 연안여객선 터미널로 가면 된다. 완도에서 청산도로 가는 배는 하루 6번 운행되고 있어서, 다른 섬에 비하면 접근성도 나쁘지 않다. 다만, 모든 섬이 그러하듯 기상의 이변이 있다면 배가 출항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탑승 전 날씨의 상황을 체크해야 한다.
‘오늘이 날’이라는 듯 바람도 잔잔히 불어오고, 하늘도 본연의 색을 드러내고 있는 완연한 초가을 날에 청산도행 배를 무사히 탈 수 있었다. 한 시간 가까이 배를 타고 가야 해서 뱃멀미로 고생하지 않을까 잠시 걱정하기도 했지만, 기우였다. 큰 배의 규모 덕분에 실내 역시 잘 갖춰져 있어서 편안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특히 바깥으로 나가 바닷바람도 쐴 수 있고 바다 풍경도 보며 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슬로시티의 상징, 달팽이와 찰칵
완도에서 청산도를 왕복하는 여객선의 모습
바닷바람을 쐬며 좋은 날씨를 만끽하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청산도. 배에서 내리는 분주한 사람들을 빼고는 전체적으로 조용한 기운이 감돌았다.
청산도는 보는 시각에 따라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곳이기에 똑똑하게 여행을 해야 한다. 11코스로 되어있는 슬로길이 대표적인데 코스별로 이동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여행시간이 많지 않은 여행자들은 차를 선적해 오는 것도 좋은 방법. 청산도를 순환하는 버스가 있기는 하나, 시간을 잘못 맞추면 기다리는 시간이 꽤 걸려서 여행 계획이 달라질 수 있다.
이도 저도 싫다면, 느리게 걸을수록 아름다움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는 청산도 곳곳을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다만, 이 여행법을 선택한다면 넉넉한 일정은 필수여야 할 것이다.
잘 되어있는 슬로길 중에서도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는데, 제일 먼저 슬로1길을 가보기로 했다.
미항길-동구정길-서편제길-화랑포길로 이어지는 이 구간은 청산도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고, 영화 <서편제>로 유명한 서편제길과,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지, 풍어제로 유명한 당리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리 입구에 주차를 하고, 슬로1길을 걸었다. 걸으며 보이는 푸른 바다, 노랗게 익어가는 벼와 코스모스가 가득한 들판, 푸른 하늘을 끼고 있는 당리마을의 전경에 청산도의 이름값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청산도는 산, 바다, 하늘이 모두 푸르러 붙여진 이름인데,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슬로1길을 걸으며 만난 꽃은 여러 가지였는데, 주로 코스모스가 길 양옆에 가득했다. 지금은 가을이라 코스모스가 대부분이지만, 계절마다 그 계절을 상징하는 꽃들이 슬로1길을 가득 메운다고 한다.
그러니 어느 계절에 와도, 슬로1길은 아름답지 않을까. 욕심 같아서는 청산도의 사계절을 다 보고 싶을 정도다.
부친 편지를 1년 뒤에 받아볼 수 있다는 느림 우체통
느릿느릿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슬로길
슬로1길을 지나, 슬로5,6길로 향했다. 슬로5길은 범바위길-용길, 슬로6길은 구들장길-다랭이길로 이어지는 구간이다.
먼저 간 곳은 슬로5길. 호랑이의 모습을 한 범바위가 있다고 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주차장까지 가는 길이 매우 좁아, 초보 운전자라면 운전대를 과감히 고수에게 넘길 것을 권한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조금 걸으면 범바위를 만날 수 있다. 범의 머리 모양을 닮아 범바위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아무리 봐도 범의 형태를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유래처럼, 한 호랑이가 바위를 향해 포효한 소리가 자신이 낸 소리보다 크게 울리자 이곳에 더 큰 호랑이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놀라 섬 밖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호랑이를 닮지 않았건, 닮았건 간에 이곳 역시 경치가 빼어난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방으로 펼쳐진 바다는 초가을의 더위도, 여행의 피로도 한방에 날려줄만큼 시원했기에.
한참을 범바위에서 머물다가 슬로6길로 갔다. 범바위 인근이어서 한 번 가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좁디좁은 길을 지나면 보이는 구들장논은 경지 면적이 작고 돌이 많아 물이 부족한 청산도의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인근 다랭이논 역시 마찬가지다. 농지와 물이 부족했던 땅을 논으로 일궈낸 것. 청산도만의 특이한 형태의 논과 밭을 볼 수 있고, 섬사람들의 애환과 열정이 깃들어 있어 다른 길과는 색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어떤 구애도 받지 않고, 느릿느릿 걸을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던 청산도. 한없이 걷다가 쉬기를 반복하고 나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들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어서인지, 빨리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사라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청산도에서의 여유와 쉼 덕분에 정신없는 일상을 꽤 잘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코스모스 핀 청산도
호랑이가 웅크린 모습을 닮은 범바위
완도 연안여객선 터미널(wando.ferry.or.kr)에서는 하루에 6회 청산도행 배를 운항 중이다.
청산도를 여행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조금 편하게 여행하고 싶다면, 차를 선적하거나 청산도 내 순환버스를 이용하면 된다.